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게오르기 가폰의 등장 === '''해당 항목의 대부분은 가폰이 남긴 글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으므로 편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external/www.allrussias.com/1905_gapon.jpg|width=100%]]}}} || || '''게오르기 가폰''' ||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1870년]] [[2월 17일]] ~ [[1906년]] [[4월 10일]], [[https://ko.wikipedia.org/wiki/게오르기_가폰|위키백과 문서]]]은 당대인들에서든 현대 학자들에게서든 굉장히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지지자들은 그를 진정한 노동자들의 성자라 칭송했고 후의 볼셰비키들은 그를 차르의 비밀경찰의 일원이라 주장했으며 반대로 차르의 장관들에게는 도발자라 비방되었다. 그는 1870년 러시아 제국의 폴타바 현에서 태어났다. 본인의 자서전에 따르면 가폰은 악마의 등에 타고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했다는 노브고르트의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 그는 자신도 요한처럼 '악마를 붙잡을 기회'[* 노브고로드의 요한은 꾀를 부려 악마를 제압하고 종으로 부렸다는 민간전설이 존재한다.]를 꿈꾸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가 자신의 땅과 농장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그를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을 교회의 사제와 상의 끝에 그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폴타바 신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 나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주장을 가감없이 이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학교측과 적잖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어느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했고 아내 역시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남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일라리온 주교에게 자신의 포부와 바램을 말했고 일라리온 주교는 젊은이를 자신의 부제로 지명하였다. 그는 이윽고 한 교구의 신부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있었다. 그는 평신도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그들의 신학적 의문, 질문에 답해주었고 때로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와 고민까지 들어주었으며 가난한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젊은 신부의 인기가 높아지고 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를 질투한 이웃 교구의 사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게오르기는 '다른 목자의 양 떼를 빼앗은 도둑'이었다. 또한 그들은 게오르기가 성직자의 위엄 없이 저급하고 천박하게 신도들을 대하고 있으며, 성직자는 결코 평신도와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상위의 존재이며 그들의 종교적, 신학적 이외의 사항과 문제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일라리온 주교가 그를 강력히 두둔하고 나섰으나 세간의 소문을 막지는 못하였다. 같은 동료 사제들 역시 뒤에서 그를 욕하기에 바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젊은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그의 결혼생활은 4년만에 끝이 났다. 이 때부터 그는 신학과 성직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낙심한 그는 두 아이를 맡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일라리온 주교의 추천장과 친분 관계에 있던 고위 성직자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러나 신학 아카데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배움은 그의 의문에 답을 내려주지 않는 '죽어버린 스콜라주의'일 뿐이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크게 낙심하고 지친 그는 미련 없이 휴학 신청을 하고 [[크림반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 친우들에게는 이것이 그저 요양을 위한 휴식이라고만 말했다. 그는 크림반도의 역사 깊은 수도원들을 방문했고 수도사들의 삶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으며 세상을 위해 봉사하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낙심하고 있던 차에 그는 두 친구 변호사 그리고리와 화가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B%A4%EB%A6%AC_%EB%B2%A0%EB%A0%88%EC%83%A4%EA%B8%B4|바실리]]를 만났다. 성직자, 변호사, 화가는 흔히 있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렸다. 게오르기 가폰은 친구들의 충고로 인민과 인민의 안녕을 위해 봉사하기로 맹세한다. 그는 수도로 돌아오고 학업을 병행하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돕는 일을 시작한다. 1899년 그는 수도의 '자비의 성모 교회(Церковь Милующей Божией Матери)'의 설교자로 일하게 된다. 가폰의 봉사와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그 수는 이천 명에 달하였다. 가렐나야 항구는 수도 부랑자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설교와 선교, 봉사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점차 가폰은 노동이야 말로 삶의 근원이자 진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부랑자들, 난민들, 빈민들과 마주하면서 가폰은 이들을 진정으로 돕고 구원할 방법에 고민하게 된다. 1900년 가폰은 성 올가 고아원과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설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상류층들의 기부, 자선과 후원으로 운용되던 단체였으며 가폰은 러시아의 상류층 인사들과 정교회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와 함께 일했던 성직자 중에서는 미래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https://en.wikipedia.org/wiki/Patriarch_Sergius_of_Moscow|세르기]]도 있었다. 가폰은 수도의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해 일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런 이들을 보호할 만한 수단과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 러시아 제국의 하층민들이 겪는 수많은 불의와 불합리함, 어려움을 보았으며 그 와중에서 인해 권력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1902년에 실업자들과 부랑자들의 회생을 위한 새로운 지원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는 황후에게까지 전해지고 시장인 니콜라이 클로이겐스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실질적인 이행은 되지 않았다. 결국 그해 가폰은 후원자들과의 의견 충돌로 있해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 자리에서 해임된다. 그리고 그때 빈민들이 부유층의 저택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과거의 후원자 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아니츠코프는 이를 자신의 해임 결정에 분노한 가폰이 빈민들을 선동해서 일으킨 일이라 생각하고 경찰에 그를 고발한다. 가폰은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